18세기 인도에서 태어난 파람 산트 툴시 사히브는 어린 시절부터 영적 삶에 관심을 보였습니다. 그는 왕족의 지위를 받아들이기보다 명상 수행을 위해 집을 떠났고, 얼마 후 완전한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시와 다른 글에서 파람 산트 툴시 사히브는 내면의 삶을 꿰뚫는 지혜와 그 빛을 묘사했습니다. 동시에 그는 신의 왕국과 직접 연결하려면 살아있는 스승이 필요함을 강조했습니다. 툴시 사히브는 스승께 감사의 표현으로 이렇게 말했습니다. 『오 툴시여, 친절하고 자비로운 스승께서 나를 축복해 삶을 꽃피우게 하시고 새 삶을 주셨네』
영적 고양에 관한 글에서 파람 산트 툴시 사히브는 내적 천상의 빛과 소리에 대한 자신의 체험을 이야기했습니다. 더욱이 모든 성인의 가르침이 똑같이 내면의 신께 가는 길과 그것을 얻는 방법에 대한 가르침을 전한다고 했습니다.
파람 산트 툴시 사히브는 자신이 전한 가르침이 카비르 사히브 지, 구루 나낙 데브 지, 다두 다얄 지와 다른 성인의 가르침과 일치한다고 말했습니다. 이제 『하트라스의 성인 툴시 사히브(채식인)의 신비주의 시』를 소개하겠습니다.
사트상(깨달은 스승과의 신성한 모임)
이것은 대화 형식의 「라탄 사가르」에서 발췌했습니다. 제자인 힐디는 사트상에 대해 질문합니다. 사트상의 이로움은 무엇입니까? 왜 어떤 이는 성인과 함께하며 어떤 이로움도 얻지 못합니까? 참지식을 얻는 데 방해가 되는 장애물은 무엇입니까? 툴시 사히브는 여러 직유와 은유로 이 모든 질문에 상세하게 답합니다.
『힐디: 「오 스승이여, 어떤 이는 많은 사트상에 참석해도 이로움을 얻지 못했다고 합니다. 수많은 날을 성인과 함께 보냈지만 결코 자신의 눈으로 신을 보지 못했습니다. 당신은 사트상을 많이 찬양했지만 그들은 이로움을 얻지 못했습니다. 제 마음에 이것에 대한 의문이 생겼습니다. 오 스승이여, 의문을 풀도록 도와주세요. 그들에게 부족한 것은 무엇이며, 어째서 이해하지 못하고 지식의 보석을 알지 못했나요?」
툴시 사히브는 말했다: 「오 형제여, 들어보시오. 진실을 설명하기 위해 노력하겠노라. 창조의 날, 영혼은 집을 떠나고 생을 거듭하며 업장의 녹을 모았네. 벌레가 나무를 파먹듯이 녹은 쇠를 부식하네. 날카로운 칼이 부식으로 무뎌지듯이, 우박은 물에 잠기고 영혼도 광채를 잃고 마네.
지독한 인과응보의 법칙은 무시무시하고 마음이 영혼을 조종하노라. 감각의 노예가 된 마음이 무모하게 배회한다. 마음과 영혼은 단단히 묶여 있고, 부정한 마음은 분별과 이해력을 잃었다. 사트상이 무엇이고 어떻게 알 수 있는지 말해보게. 글을 모르고 무지한 자가 책을 읽으려 하네. 그가 철자도 모르는데 글의 의미를 어찌 알겠는가?
그렇듯이 그들은 성인과 함께하지만 음식과 탐욕에 빠져있다네. 그들 마음이 그러한 쾌락에 도취하는 한 그들은 성인의 회합에 계속 함께해도 성인의 방식과 기술을 결코 이해하지 못하네. 그렇다면 어떻게 진리를 깨닫길 바랄 수 있을까?
마음껏 먹고 오래 자는 자, 한가한 잡담에 빠지고 변덕스러운 마음을 다스리지 않는 자, 수많은 출생으로 그들 마음은 엉킨 실과 같으니 그런 꼬인 실을 누가 풀 수 있는가? 열심히 노력하거나 스승께 맡겨야 하네. 영적 수행을 하거나 스승께 귀의할 길을 찾아야 하네. 둘 다 하지 않으면 목적 없이 방황하니, 변덕스러운 마음과 말로 어찌 목표에 이를까?
스승의 발치에서 내면의 사랑을 다시 피웠는가? 자신의 스승에게 진정한 이로움을 얻고 성심으로 성인에게 간청하는 자는 성인의 자비와 구원을 얻으리라. 성인을 알아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라네. 그는 성인에게 잔꾀와 속임수로 대하네. 행동으로 성인을 알려고 하는 자는 많은 생을 보내더라도 그들을 알지 못하리라.
성인의 방식과 방법은 불가해하고 깊어서 순진한 관찰자가 어찌 그 위대함을 알아볼까? 베다는 성인을 묘사하길 『이것도 저것도 아니다』 예언자도 그들의 비밀을 풀지 못하리라. 브라마, 비슈누신, 시바신조차 그들 신분을 알 수 없네. 외면의 표식으로 성인을 평가할 수 없네. 누가 성인이 어떠한지 안다고 주장한다면 툴시는 놀라서 손으로 귀를 막으리라.
고귀하고 선하며 행운인 자는 드물다. 그들은 성인의 발치에 관심을 집중한다. 세상과 그 형상을 환상으로 보는, 초월을 사랑하는 자는 진정으로 판단할 수 있다. 짐승의 수준에서 사는 이 사탄의 노예들이 성인에 대해 무얼 알 수 있을까?
오 힐디여, 그런 자가 얼마나 틀린 지 말할수 없다. 그들의 악행을 묘사하려 한다면 종이와 잉크가 부족할 거라네. 진아를 전혀 알지 못하고 계속 망상에 빠져 있네. 그들은 낮은 데서 즐기며 삶을 낭비하고 빈손으로 돌아오네.
오 힐디여, 그들은 정말 성인과 함께 살지 않았고, 깊이 몰입하지 않고, 감로수를 마시지 않았다. 돌에 물을 부으면 돌의 물기가 빨리 마르고 수분이 스며들지 않으니, 계속 메말라 있을 뿐 무엇을 할 수 있는가? 설탕을 물에 넣으면 녹아서 단맛이 난다. 둘은 하나가 되고 물은 설탕이 들어가 달콤해지네.
오 형제여, 단맛이 흡수하여 물이 시럽으로 변하네. 아무도 더는 물이나 설탕이라 부르지 않는다. 이제 시럽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마찬가지로 사트상에 들어가는 이는 망상에 시달리지 않을 것이다」』
다음의 시는 같은 생각을 불러옵니다. 학자, 전문가, 의식연구자 같은 세상 사람은 모두 사트상의 가치를 찬양하고, 그들 모임을 「사트상」으로 부릅니다. 하지만 사트상은 진리를 알며 깨닫고 자각한 영혼들의 모임이며, 완전한 스승과 함께하는 것입니다.
툴시 사히브는 성인과 함께 있어도 세속적인 사람들은 진정한 이로움을 얻는 데 실패한다고 말합니다. 세상과 그 대상과 쾌락에 모든 관심을 쏟기 때문입니다.
『「사트상, 사트상」 학자, 의식 연구자, 세상의 많은 이가 말하나 학자, 의식 연구자, 그리고 온 세상은 진실로 그 진정한 의미를 알지 못하네. 누구에게 그걸 말할까? 그들은 감각적 쾌락의 만족에 탐닉하네. 그들이 어떻게 진정한 사트상과 함께할까?
아들과 아내는 꿈, 공허한 쇼일 뿐, 그들은 색이 바래는 연처럼 잠깐 그대와 함께한다네. 자신의 미각을 위해 오 툴시여, 그대는 스승에게 귀의하지 않네. 학자와 의식 연구자, 온 세상의 대부분이 모두 사트상, 사트상 말만 하네』
스승의 인류애
『툴시 사히브가 여기서 스승이 제자에게 주신 선물을 열거합니다. 스승은 제자의 일상적 행동을 인도하고, 또한 내면의 영적 여정에 헤아릴 수 없는 도움을 주시네. 오, 깊이 생각하고 성찰하세요.
스승의 인도 없이는 영원히 길을 찾을 수 없습니다. 스승은 사트상의 색으로 그대를 물들이네. 천상의 영역으로 그대 영혼을 데려가 내면의 하늘을 밝혀주시네. 그대 내면의 영적 왕국을 밝히고 싶다면 오직 성인만이 도울 수 있네. 그대는 잠시 후에 떠날 것이고 몸은 티끌이 되겠지. 오 툴시여, 그대의 스승만이 집으로 돌아가는 문을 보여줄 수 있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