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가 세상을 바꿀 생각을 하지만 아무도 자신을 바꿀 생각은 하지 않는다』 레오 톨스토이의 이 통찰력 있는 말은 내면을 반성하지 않는 우리를 돌아보게 합니다. 우리는 이것을 하기를 신께서 원할지는 결코 묻지 않으며 일을 벌입니다. 톨스토이의 말입니다. 『신의 이름으로 잠시 일을 멈추고 주위를 둘러보라』 레오 톨스토이는 결국 만년에 30년 이상 도덕적 철학자와 종교 지도자의 역할을 했습니다. 게다가 채식을 하며, 채식을 알리고 그리스도의 윤리적 가르침을 해석해 독실한 기독교인 평화주의자가 됐지요. 평화와 신의 뜻을 이룬다는 그의 개념은 마하트마 간디와 마틴 루터 킹 주니어 같은 20세기 지도자들에게 큰 영향을 끼쳤습니다.
칭하이 무상사께서 1997년 7월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우리 회원들과 단체명상에서 톨스토이에 대해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톨스토이는 수행자거든요. 그래서 그의 소설을 읽으면 대부분이 영적인 주제와 신에 대한 것이고 아주 행복하며 긍정적입니다. 그의 책은 아주 좋으니 읽어 보세요. 읽지 않았다면 읽어보세요. 더 많이 읽어도 돼요. 그런 글들은 여러분에게 아주 좋아요." 우리는 톨스토이의 『삶의 오솔길』 2권에서 종교와 인생, 죽음 등에 관한 톨스토이 철학의 통찰력을 살펴보겠습니다.
생명의 병
육체의 생명에서 행복을 침해하는 것을 우리는 병이라고 합니다. 게다가 삶 전체는 우리 몸에 행복을 주는 우리 영혼을 해방하는 점진적 과정입니다. 그러므로 삶을 있는 그대로 이해하는 자에게 병은 없습니다.
1. 우리가 고통이라 부르는 것은 삶에서 필요한 조건이다.
이 지상의 삶에서 역경을 견디는 것이 사람에겐 축복입니다. 왜냐하면 이것이 가슴의 신성한 고독으로 인도하니까요. 자신이 고향 땅에서 추방되었으며 세속에 즐거움은 없고 의무만 있음을 발견합니다. 반박과 치욕을 겪고 자신의 의도가 순수하고 행위가 의롭더라도 남들이 나를 나쁘게 생각하는 것도 또한 축복입니다. 이것이 그를 겸손하게 하고 헛된 영광에 빠지지 않게 합니다. 이러한 일들이 대개는 축복으로, 우리가 내면의 증인인 신과 교감하게 하며 세상이 우리를 거절할 때 치욕을 겪고 사랑이 사라지는 것에서 우리를 지켜줍니다. 아시시의 성 프란체스코가 몹시 춥고 폭풍이 부는 날, 한 제자와 페루자에서 포르시운쿨로로 돌아왔을 때, 여기서 완전함 기쁨을 이루는 걸 제자에게 말합니다. 그는 완전한 기쁨이 덕 있는 사람으로, 칭송받는데 있지 않고, 질병을 치유하고 귀머거리를 듣게 하고 장님을 보게 하는 능력을 가진 것과 상관없으며, 선견지명이나 미래를 예언하는 데 있지 않고, 별들의 궤도를 알아내거나 모든 동식물의 특징을 알아내는 데 있지 않으며, 하나의 참된 믿음에 대한 모든 사람과의 대화에도 없다고 했지요.
『그러면 어디에 참된 기쁨이 있나요?』 제자가 물었지요. 프란체스코가 대답합니다. 『우리가 젖었으며 더럽고 찬바람에 떨고 굶주리면서 수도원에 도착해 문을 두드릴 때 문지기가 묻기를 「누구요?」 할 때 우리가 「형제요」라고 말하면 그가 말하겠지. 「거짓말이오, 당신들은 세상에서 뻔뻔하게 다니는 부랑자들이고 사람들을 부추겨 구호금을 훔치는 자요. 썩 꺼져요. 당신들은 들어올 수 없소」 만일 그럴 때 춥고 굶주려 감각이 없어도 우리가 이 말을 겸손과 사랑으로 받아들이고 자신에게 말하기를 문지기가 옳으며 이것은 확실히 신께서 그의 마음에 우리를 이렇게 대하도록 한 것이라 할 때야 완전한 기쁨을 알 것이다』 모든 일과 모든 부상에서 우리에게 부담을 주거나 상처를 입힌 자들도 오직 사랑으로 받아들이면 모든 부담과 모든 상처는 기쁨으로 변할 것입니다.
이 기쁨은 완벽합니다. 왜냐하면 다른 모든 기쁨은 파괴할 수 있지만 이 기쁨은 파괴할 수 없고 항상 우리 능력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만일 어떤 신이 우리 삶에서 모든 슬픔과 슬픔의 원인을 없앨 것을 제안한다면 첫 충동이 우리에게 그 제안을 받아들이도록 강하게 유혹할 겁니다. 귀찮은 의무와 궁핍이 우리를 억압할 때나 아픔의 고통이 쇠약하게 만들 때, 근심이 가슴을 쥐어짤 때, 수고하지 않는 삶, 휴식하고 안전하며 평화롭고 풍요로운 삶보다 더 좋은 건 없다고 느낍니다. 그러나 그런 삶을 잠시 경험한 후에 우리는 신에게 이전의 수고롭고 가난하고 슬프고 걱정 있는 삶을 돌려달라고 청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슬픔과 근심에서 완전히 해방된 삶은 지루하면서 또한 참을 수 없습니다. 삶에서 슬픔과 슬픔의 원인, 모든 위험, 장애물, 실패는 사라질 것이고 그들과 함께 모든 노력과 분투와 모험의 즐거움과 전투의 긴장과 승리의 기쁨도 사라집니다. 훼방 없이 달성한 계획과 장애 없는 성공만 남을 것입니다. 우리는 이길 것을 사전에 아는 게임에 곧 싫증 날 것입니다.
2. 고통은 인간의 영적 삶을 북돋운다.
인간은 하나님의 영이 육신의 옷을 입은 것입니다. 인간은 삶의 초기에 이점에 무지해서 생명이 육신에 있다고 상상합니다. 그러나 더 오래 살수록 참 생명은 육신이 아닌 영혼에 있음을 더 분명하게 깨닫습니다. 사람의 일생은 이 사실의 점진적인 인식입니다. 육신의 고통에서 이런 앎을 가장 쉽고 분명하게 얻기에 그러한 고통은 우리 삶을 바람직한 영적인 삶으로 만듭니다. 육체의 성장은 육신이 쇠약하면서 시작되는 영적 성장을 위한 준비물을 저장하는 것에 불과합니다. 육신을 위해 사는 사람은 모든 것이 악하다고 합니다. 영을 위해서 사는 이는 그게 아니라 모든 것이 선하다고 말합니다. 악이라 부르는 것은 바로 숫돌로써 그것이 없다면 내면에서 가장 소중한 내 영혼이 둔해지고 녹슬게 됩니다. 모든 인간의 불행은 전체에게 그리고 각자에게- 비록 간접적이지만- 인간 앞에 놓여있는 같은 목표로 이끕니다. 각 개인이나 크게는 인류에게 점점 더 많은 영적 원칙이 계속 드러납니다. 내가 하늘에서 내려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아버지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 나를 보내신 아버지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는 것이니라: 요한복음 6장 38~ 39
우리에게 주어지고 우리에게 맡겨진 신성의 불꽃을 가능한 최상의 등급으로 보존하고 기르고 개발해야 합니다. 마치 유모가 아이를 맡듯이 말입니다. 이 목적을 이루려면 무엇이 필요할까요? 그것은 열정의 기쁨도 아니요, 인간의 영광도 아니며 휴식의 삶도 아닙니다. 그러나 그 반대로 금욕과 겸손과 노동과 노력과 궁핍과 고난과 굴욕과 신약성서에 여러 번 언급된 박해까지 포함됩니다. 필요한 이런 모든 혹독한 시련은 우리에게 작거나 큰 규모로, 각종 형태로 옵니다. 오 그 시련들이 필요하며 그러기에 시련을 우리가 삶으로 착각하고 그 개선을 행복으로 여기는 동물적 생활에 더해진 귀찮은 방해로 여기는 대신에 기쁜 일로 받아들이는 법을 알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