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1929년의 책 『아그니 요가』를 소개하겠습니다. 모리야 스승의 크게 고양하는 가르침을 제자 헬레나와 니콜라스 레리히가 기록했습니다. 이 글은 의식 진화의 과정을 따를 것을 강조하고 또한 그것이 목표이며, 현대와 미래 세대에게 순수한 영적 영감을 주고 있습니다.
아그니 요가 (1929년)
『부름, 계시와 공동체』라는 전집을 주신 신성한 마하트마(모리야)께서 많은 자문과 아그니 요가의 표식을 주셨습니다. 이런 실질적 지시를 지혜를 찾는 사람이 사용할 수 있도록 저희가 모았습니다. 산스크리트어와 센자르어(고대 언어)는 이 설명에 특별한 향기를 더하며, 다른 언어는 항상 같은 특징을 보여주진 않지요. 어쨌든 표현의 의미는 정확하게 보존되었습니다. 그래서 현대의 사람들이 수 세기의 경험에서 우러나오는 이 지혜의 가르침을 큰 흥미를 느끼고 읽을 것입니다.
서문
요가는~ 우주적 성취를 위한 최고의 다리~ 모든 시대에 존재했습니다. 각각의 가르침은 진화 단계에 적용될 자체 요가로 구성됩니다. 요가는 서로 모순되지 않습니다. 한 나무의 가지처럼 요가는 그늘을 만들어 더위에 지친 여행자를 상쾌하게 합니다.
힘을 되찾은 여행자는 길을 계속 갑니다. 자신의 것이 아니면 취하지 않으며, 노력을 분산하지 않습니다. 그는 우주에 표현된 자애로움을 받아들입니다. 그는 운명의 힘을 벗어납니다. 자신의 하나의 속성을 통달합니다. 요가의 힘을 거부하지 말고 이루지 못한 노동의 끝으로 데려가는 빛처럼 되세요.
미래를 위해 우리는 잠에서 깨어납니다. 미래를 위해 우리는 옷을 갈아입습니다. 미래를 위해, 우리는 자신을 격려합니다. 미래를 위해 우리는 사색에 힘씁니다. 미래를 위해 우리는 힘을 모읍니다. 우선 우리는 인생의 조언을 활용할 것입니다. 그런 다음 우리는 다가오는 시대의 요가 이름을 말할 것입니다. 불 원소의 나아가는 발걸음 소리를 들을 것이고, 이미 불꽃의 파동을 다스릴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과거의 요가인 라자 요가를 칭송하고, 미래는 아그니 요가의 시대임을 주장합니다. 그들은 물을 것입니다. 『미래불인 미륵불의 시대가 새 시대를 창조할 수 있을까요?』 대답은 『만약 십자군이 새 시대를 열었다면, 미륵불의 시대는 진실로 천 배는 더 중요합니다』 우리는 그런 의식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사람들은 신이나 보살의 뜻을 깨닫지 못합니다. 마치 장님처럼 묻습니다. 『빛이 무엇인가요?』 하지만 사람들은 날마다 빛을 감지해도 그것의 특성을 제대로 묘사하지 못합니다.
유별난 사람들은 너무 조심하며 빛과 어둠의 경계를 혼란스러워합니다. 그들에겐 가장 큰 별의 궁전에 신이 거한다고 믿기가 더 쉽지요. 그렇지 않다면 그들 신은 지낼 곳이 없습니다. 그들은 공통의 기준이 없기에 존재를 경시하게 됩니다. 당신은 질문에 답을 얻지 못하는 이유가 궁금합니다. 생각의 화살이 종종 대답의 주제를 스쳐 지나감을 알아야 합니다.
밧줄을 타고 심연을 건너는 여행자를 상상해 보세요. 그를 부르는 것이 현명한 것일까요? 부름이 균형을 깰 수 있죠. 따라서 이름을 너무 자주 부르지 말고 급할 때를 위해 남겨두어야 합니다. 개별적 이름을 사용하는 능력은 필요하지만 이름을 말하는 것은 허공에 망치를 치는 것과 같아야 합니다. 단순한 사람을 위한 단순한 말과 관련해서, 단순한 사람은 약을 더 적게 먹는 걸 기억해야 합니다. 위와 아래에서 똑같은 법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단순한 사람이 최고의 전도사입니다.
영체로 다른 행성을 방문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의식이 하나의 행성에 국한되지 않는 미래가 있음을 나타냅니다. 세상의 한 곳에서 다른 곳으로 가듯이 행성 간을 가는 데도 같은 원칙이 적용될 것입니다. 스승은 영혼의 성취마다 기뻐하라고 합니다. 다른 행성을 오가는 것은 육신과 아스트랄체를 오가는 것보다 어렵지 않으며, 생각의 과정을 이해하고 별에 가려고 애쓰는 것보다 복잡하지 않습니다. 오직 행성 간의 일을 위해 노력할 때 우리는 인류의 진화를 확신할 수 있습니다.
새로운 광선의 출현은 우리 계획에 아름다움을 더하게 합니다. 별의 형태를 고체화하는 것은 영체의 의식적인 활동과 비교하면 중요하지 않습니다. 이 행성에서 임무를 위해 영체가 보호받는 상태에서 나올 필요는 없습니다. 하지만 가장 고차적 몸이 행성간 활동에 필요합니다. 새로운 광선에 대한 확인은 다양한 차원에서 의식을 유지하게 합니다.
이전엔 대기의 특정층에만 의식을 유지하게 했습니다. 그러나 기류에 의한 차단은 여전히 가능했습니다. 하지만 새로운 광선은 이 차단을 통과해 개방된 통로를 만들었기에 의식 활동이 확장됩니다. 우리 공동체에서 이러한 광선의 활용에 대해 작업 중입니다. 보통 그 광선은 우리 뇌에 큰 영향을 주지 않지만 때론 매우 위험할 수 있습니다. 왜 지혜의 스승들이 세상을 떠날 때 그러한 고통을 겪어야 하는지 알 수 있습니다.
물론 이 고통은 의도적이고 자발적으로 선택한 것입니다. 주인이 손님의 잔을 가득 채우듯 스승은 가르침의 이 마지막 표식을 통해 깊은 인상을 주길 바랍니다. 부처님의 독살로 신격화에서 벗어났습니다. 그리스도의 고통과 부활 (또는 물질의 변화)는 지상에서 가장 위대한 업적을 달성하게 했습니다. 하지만 아무도 몸이 원소 상태로 분해되는 것에 대해 몰랐습니다. 사람들은 제자들이 그의 육신을 훔쳐갔다고 생각했습니다.
구세계의 비방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각각의 진정한 성취는 우주를 위해 필요합니다. 포드비그(공적, 위업, 자기완성, 자기 부정)의 창조성은 창조의 모든 과정에서 동일합니다. 형태의 깊이를 증가함으로 우리는 영원의 수정을 창조합니다. 완전함의 감각은 창조적 표현 정신을 고양합니다. 현실주의자인 그리스도는 완전한 의식 속에서 포드비그(공적)가 변화 현상에 선행하길 바랐습니다.
초현세적인 것과 세속적인 것이라는 두 가지 포드비그를 언급할 수 있습니다. 초현세적 노력의 경우는 평화로운 죽음이 특징일 수 있지요. 포드비그의 행위를 판단하려 하지 맙시다. 왜냐하면 진화에 대한 이해는 각자 다르고 임의적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오라를 관찰할 수 있는 사람은 빛이 발산되는 모습을 생생하게 볼 것입니다.
이성적 행위의 계획은 이런 우주의 흐름에 대한 관찰이 바탕일 수 있습니다. 쇠퇴의 각 징후는 어둠의 산물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빛의 파장이 있고 생명의 불꽃이 교류하는 곳에 우리의 광선이 있습니다. 나의 가르침은 관찰한 아카샤(모든 공간에 존재하는 초감각적인 영적 진수)의 파동을 밝혀줄 수 있습니다.
불꽃의 즐거움을 맞으세요. 이는 기분전환이 아닌 심화된 과제입니다. 우리 의지를 드러내야만 거기에 접근할 수 있습니다. 정신의 아름다움을 보존하는 것이 내 소망이죠. 각각의 움직임은 영의 성취로 변할 수 있습니다. 의식의 진화와 닥치는 사건의 소용돌이에 집중하면 우주적 회전의 새로운 전환으로 이어질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