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미십자회로도 알려진 고대 신비 장미십자단 AMORC는 세계적인 문화교육 철학단체로, 장미십자회의 심오하고 실용적인 가르침을 보존합니다. 이 가르침은 고대 이집트에서 유럽으로 전해진 후 수백 년간 더해지며, 이제 전 세계에서 우주와 자연, 인간의 신비와 관련되어 있습니다. 장미십자회 도서관은 영적 지혜와 통찰의 근원입니다. 거기엔 장미십자회의 존경받는 지도자인 하비 스펜서 루이스와 랠프 M 루이스, 크리스천 버나드의 중요한 저술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오늘은 랠프 M 루이스 형제의 저서 『자아의 성소: 8장과 9장 인과응보와 업, 업의 결과』를 소개하겠습니다. 이들 장에서는 업에 숨겨진 개념과 장미십자회의 업에 대한 해석 및 인과법칙과 관련된 이해를 제공합니다.
8장. 인과응보와 업
『고대 힌두교 가르침에서 도덕적 인과를 의미하는 산스크리트어 용어가 내려옵니다. 이 말은 업입니다. 어원은 행위 또는 하는 일을 의미합니다. 이 용어를 둘러싼 교리나 이 용어의 토대는 인도의 많은 주요 종교 - 예를 들면 불교에 퍼졌습니다. 부처님은 영혼이 무량한 시간 동안 계속 윤회해야 한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불교의 목적은 육신 형태의 지속적인 환생, 즉 형상화를 멈추는 것입니다. 불교 원리에 따르면, 개별 생명체의 행동은 원인이 되고, 그 원인에 따라 일련의 결과가 생깁니다.
이러한 결과가 업이며, 업은 축적되며 물려받거나 전생에서 가져옵니다. 그러므로 영혼이 중생의 영역에서 매번 육신의 형태로 환생할 필요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반드시 업을 소멸해야 합니다. 부처님에 따르면 환생은 도공의 물레와 같으며, 물레를 계속 돌리는 도공의 손에 자극을 받습니다. 매번 환생에서 행동은 육신 형태 속으로 윤회의 바퀴를 계속 돌리는 원인입니다. 업을 소멸하고 우리의 행위에서 업이 생기지 않을 때, 이제 원인이 없어지니 윤회의 바퀴가 움직임을 멈추고, 영혼은 지상의 육신에 다시 있을 의무가 없죠.
불교는 업이 네 가지라고 말합니다. 현생에 지상에서 인간으로 사는 동안 결과가 닥치는 업, 내세에 윤회해서 결과를 맞는 업, 정해진 시간이 없는 업으로 이생이나 지금부터 많은 미래생 중 하나에 일어날 수 있는 업, 지나간 업이 있습니다.
지금 현생의 생각에서 나온 행동은 다음 환생에서 업으로 옵니다. 하지만 만일 결과가 생기지 않으면 과거의 업이 되며, 이어진 행위에 의해 어떤 식으로든 가볍게 된 것입니다. 불교는 우리 행위의 책임이 전적으로 자신에게 있음을 분명히 합니다. 그것은 전적으로 개인의 책임입니다. 업의 책임을 남에게 전가할 수 없습니다. 불교는 더 나아가 자기 행위에서 도망칠 수 없다고 합니다.
원인에 따라 결과를 하늘이나 바다, 땅에서 받아야 합니다. 그는 우리가 악을 경험하면 악을 피하는 법을 배운다고 합니다. 이건 도피가 아니라 원인에서 어떤 결과가 따르는지 알면 그 원인을 피하는 법을 배우는 겁니다.
불교에서 업은 가차 없는 법칙입니다. 예외도 없고 벗어날 수 없지요. 불교 교리에는 크게 두 가지 업이 있습니다. 하나는 순수하고 다른 하나는 불순합니다. 불순한 업은 계속 존재하게 만듭니다. 죽을 존재로 다시 환생해야 합니다. 불순한 업에서 고통은 항상 행위 자체에 비례합니다. 행위에서 악의 정도에 따라 결과가 정해집니다. 여기에 다시 행위에 대한 응보의 원칙이 있죠. 순수한 행위의 업은 결국 윤회의 바퀴를 멈춥니다. 영혼은 육신 형태의 더 많은 감옥에서 해방됩니다』
9장. 업의 결과
『장미십자회의 신비주의도 업의 교리를 받아들이지만, 그 적용은 동양의 선배들과 상당히 다릅니다. 장미십자회원에게 업은 인과의 법칙과 동등합니다. 모든 결과에는 반드시 적극적 원인과 소극적 원인이 모두 있습니다. 정신적이든 육체적이든 모든 행위는 원인 자체와 관련된 가치의 결과가 생깁니다. 따라서 창의적이며 도덕적으로 선한 일련의 행동을 하면 결국 개인에게 크게 이롭습니다.
장미십자회와 신비주의에서 인과의 법칙은 과학처럼 편차가 없다고 가르치죠. 결과가 반드시 따라옵니다. 잘못은 흔히 고통을 가져옵니다. 하지만 행위의 결과와 관련된 고통은 의도된 결과가 아니며, 피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필연적으로 원인을 따르지만 징벌을 의도하지는 않습니다. 보복의 상황이 아니라 그러한 고통이나 즐거움으로부터 인간은 원인 행위의 결과를 배웁니다. 그것을 행할 때 무엇을 기대할지 압니다.
많은 사람이 도덕 규범에 반대할 수 있습니다. 이성과 일치하지 않는 규범을 발견할 수 있죠. 그것을 비논리적으로 생각할 수 있지만, 경험하는 자기 행위의 결과에 대해 논쟁하거나 반박할 수는 없습니다. 그걸 피할 수 없음을 알고 그것에 삶을 맞춰야 합니다. 따라서 업은 개인에게 신성한 우주 법칙에 대한 직접 경험을 제공합니다. 반드시 자신이 직접 인식해야 하는 경험입니다. 남과는 관련이 없습니다.
따라서 업은 맹신, 의심과 회의를 없애고, 대신 올바른 삶에 대한 지식을 제공합니다. 잘못된 행동, 심지어 무지조차 변명의 여지가 없습니다. 우리 행위에서 생긴 크고 작은 업의 결과가 있습니다. 사실 우리는 매일 거의 무수한 작은 업을 만듭니다. 가령 우리가 무언가를 먹고, 그 결과 소화불량에 걸릴 수 있습니다. 눈을 너무 많이 사용해 근육에 무리가 가고 짜증 나는 두통을 겪을 수 있습니다.
그러한 고통은 자연이 주는 처벌이 아닙니다. 그것은 응보가 아니라 인과법칙의 자연스러운 순서입니다. 이는 합계에 도달하는 과정과 숫자 자체의 수학적 필요성에서 진행되는 숫자의 합계와 같습니다. 그 합을 고집하거나 강요하거나 제공하려는 어떤 마음이 있어서가 아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