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랠프 월도 에머슨의 에세이 『시인』 14~16장을 소개하여 영광입니다. 신의 자녀로서 신성한 본성을 강조하고, 우리가 신과 다시 연결하도록 돕는 안내자로서 시인의 역할을 탐구합니다.
『이러한 애착의 내면성과 신비로움은 모든 계층의 사람들이 상징을 사용하도록 이끈다. 시인과 철학자의 학파가 대중이 상징에 반한 것보다 상징에 더 반한 것은 아니다. […]』
『가장 빈약한 경험조차 생각을 표현하는 모든 목적에 아주 풍성하다. 왜 새로운 사실에 대한 지식을 탐내는가? 낮과 밤, 집과 정원, 몇 권의 책, 몇 가지 행동은 모든 거래와 모든 구경거리만큼 우리에게 도움이 된다. 우리는 사용하는 몇 가지 상징의 의미를 다 소진하지는 못했다. 우리는 그것을 극도로 단순하게 사용할 수 있다. 시가 길 필요는 없다. 모든 단어는 한때 시였다. 모든 새로운 관계는 새로운 단어이다. 또한 결함과 기형도 신성한 목적에 사용하며 세상의 악은 오직 악한 눈에만 그렇다고 우리 관점을 표현한다. 신화학자들은 고대 신화에서 결함이 신의 본성에 기인한다고 보았다. 불칸은 절름발이고 큐피드는 눈이 멀었는데 이는 과잉을 나타내기 위해서이다』
『시를 읽는 독자는 공장 마을과 철도를 보고 그것들이 풍경 속에서 시적 아름다움을 깨뜨린다고 생각한다. 이는 이런 예술 작품이 아직 낭독에서 신성화되지 않았기 때문이지만 시인은 그것들이 벌집이나 거미의 기하학적 거미줄만큼 위대한 질서 속에 속한다고 본다. 자연은 그것을 매우 빠르게 생명 순환에 받아들이며, 미끄러지듯 달리는 기차도 자신의 일부인 양 사랑한다. 게다가 중심 잡힌 마음엔 얼마나 많은 기계의 발명품이 선보이든 아무 의미도 없다. 수백만 개를 추가해도 그렇게 놀랍지 않으며 기계학의 사실은 한 알의 무게도 얻지 못한다. 영적인 사실은 많거나 적은 세부 사항으로 인해 변하지 않는다. 어떤 산도 지구 곡선을 끊을 만큼 눈에 띄게 높은 것은 아닌 것과 같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