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미십자회로도 알려진 고대 신비 장미십자단 AMORC는 세계적인 문화교육 철학단체로, 장미십자회의 심오하고 실용적인 가르침을 보존합니다. 이 가르침은 고대 이집트에서 유럽으로 전해진 후 수백 년간 더해지며, 이제 전 세계에서 우주와 자연, 인간의 신비와 관련되어 있습니다.
장미십자회 도서관은 영적 지혜와 통찰의 근원입니다. 거기엔 장미십자회의 존경받는 지도자인 하비 스펜서 루이스와 랠프 M 루이스, 크리스찬 버나드의 중요한 저술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제부터 우리는 랠프 M 루이스 형제의 저서 『자아의 성소 4장: 사랑과 욕망 1부, 신비』를 읽어 보겠습니다. 세 종류의 사랑과 각각의 성질을 알아보겠습니다.
사랑과 욕망
사랑은 인류의 모든 내적 경험 중에서 가장 복잡하지만, 또한 각 개인이 어느 정도까지는 경험한 것이다. 사랑은 그 산물이나 지적인 성취가 아니라 자신이 갖는 감정적, 심리적 성취다. 왜냐하면 사랑은 시인에 의해 상당히 미화됐기 때문에 대부분 사람은 사랑을 우연한 경험에 맡기거나 공식이나 방법 없이 신비하게 얻어야 한다고 믿는다. 사랑의 종류는 다양하다.
이슬람 신비주의인 수피교에선 신의 사랑이 인간의 신에 대한 사랑으로 표현된다고 한다. 수피교에 따르면 신께서 인간이 신을 사랑할 수 있게 만들었기에 인간이 신성한 사랑, 즉 신의 사랑을 표현하면 신께서 진실로 자신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한다. 그래서 인간이 신의 사랑을 거부하면 그는 신성을 제한하는 것이며, 그러므로 수피교는 신의 사랑을 가장 높이 찬양한다.
이슬람 신비주의자 두덤이 순수한 사랑, 고갈되지 않는 사랑에 관해서 물었다. 그리고 제자들을 깨우치기 위해 자신의 질문에 스스로 답했다. 그것은 신의 사랑이라고 말했는데, 신의 사랑은 마음을 빼앗기에 어떤 사랑도 그와 겨루거나 줄어들 수 없기 때문이다.
그는 또한 이 순수한 사랑인 신의 사랑은 사심이 없다고 말했다. 그것은 그로부터 생길 이익에 영향받지 않음을 뜻한다. 즉 이 순수한 사랑을 가진 사람은 사랑의 결과로 얻을 것 때문에 신을 더 많이 사랑하지 않으며, 신을 사랑하기 위해 희생해야 한다고 신을 더 적게 사랑하지 않을 것이다.
이슬람 철학자이자 10세기 신비주의자 알 가잘리는 바그다드에서 이슬람 신비주의 교리를 가르쳤다. 그는 세 종류의 사랑을 훌륭하게 구분했다.
첫째는 자기애로서 자기보존 본능에서 생긴다. 많은 신비주의자와 철학자가 이 자기애를 싫어했지만 그는 이것을 매우 중요하다고 여겼다. 존재하려면 적어도 우리의 존재를 충분히 사랑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다른 어떤 사랑도 경험할 수 없을 것이다.
둘째는 다른 사람이 주는 혜택 때문에 그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다. 그것은 자연스러운 사랑이며 어떤 의미에서 우리의 사랑은 첫 번째인 자기애와 유사한데, 예를 들어 치유 능력 때문에 의사를 사랑하거나 잘 설명해주는 교사를 사랑하는 것들이 그렇다.
알 가잘리에 의하면 셋째이자 가장 숭고한 사랑은 어떤 것을 그 자체로 사랑하며, 거기에서 나올 이익을 위한 사랑이 아니다. 그것 자체가 즐거움의 본질이다. 아름다움의 본질이 우리가 거기서 얻는 즐거움인 것처럼 그 본성 때문에 좋아한다. 그는 식물을 향한 사랑, 흐르는 물을 향한 사랑 같은 비유를 사용한다.
언제나 먹을 수 있는 식물이거나 마실 수 있는 흐르는 물이라는 이유로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그 광경과 그 성질과 그 내면에 담긴 아름다움만으로 사랑하기도 한다. 알 가잘리는 결론 짓는다. 「아름다움이 있다면 사랑하는 것이 당연하다」 신이 아름답다면 자신의 모습을 드러낸 모두에게 분명히 사랑받을 것이다. 더 아름다운 것일수록 더 사랑받는다.
세상의 신비 학설에 많은 공헌을 한 신플라톤학파의 아버지 플로티노스 또한 여러 종류의 사랑이 있다고 선언했다. 가령 자기 창작품에 대한 장인의 사랑, 자기 작품을 향한 가구 제작자의 사랑, 자기 기술의 결과에 대한 금세공인의 사랑이나 자기 학문에 대한 학생의 사랑이다.
플로티노스는 가장 숭고한 사랑은 신관의 사랑이라고 말한다. 이것은 내면의 보편적 영혼에 대한 사랑, 절대자를 향한, 언제나 그 한 부분인 단일성에 대한 사랑이다. 인간의 육체적 본성은 그가 일반적으로 용인한 삼위일체의 한 부분이다. 음식, 음료, 거처, 수면 같은 것이 그것에 필수적인 요소이다. 그것들이 부족할 때 불균형이 생긴다.
인간의 육체적 본성의 완전함이나 충만함은 정상적인 상태이다. 이런 정상 상태는 행복이라고 알고 있는 일종의 즐거움, 만족감을 동반한다. 사람의 육체가 의존하는 것이 부족할 때 우리는 짜증이 나거나 부조화를 느낀다. 이 부조화가 욕망을 낳는다. 우리의 목표, 즉 각각의 감각기관이 찾고 있는 이상이나 성질이 있다.
향기가 기분 좋기 때문에 후각은 향기를 원한다. 단맛이 즐겁기 때문에 미각은 단맛을 원한다. 귀와 신경계에 즐겁기 때문에 조화로운 소리를 원한다. 원하는 이런 성질을 드러내는 것에 우리는 끌리게 된다. 우리는 형태상 균형을 갖췄거나, 또는 우리 눈에 보기 좋은 것을 아름답다고 말한다. 아름다움이란 시각적 경험을 통해 우리의 시각에 즐거운 것을 의미한다.
후각의 향기도 아름다움의 일종이며, 그 감각에 조화로운 이상을 상징한다. 마찬가지로 달콤함은 미각에 있어 아름다움의 일종이다. 아름다움은 시각에 즐거운 것의 이름일 뿐이다. 각각 감각은 일치하는 성질 혹은 욕망하는 아름다움을 갖고 있다. 감각에 즐거움이나 만족을 주는 모든 것은 아름다움의 다른 이름이다.
그렇다면 욕망은 아름다움이나 그와 동등한 걸 찾으려는 욕구다. 욕망이 작용하는 성질을 충족시킬 물건이나 상태를 찾는 것이다. 인간이 자신의 복합적인 존재에 대해 사색한 이래 인간은 주로 자신을 세 가지 특성, 즉 첫째 육체적, 둘째 지적 혹은 정신적, 셋째 영적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종종 앞의 두 개를 하나로 통합했다. 그러므로 세 가지 특성은 인간 존재의 단계를 구성한다.
이 세 가지 특성은 모두 섞여 있지만 그들은 각각 분명한 특징을 가졌다. 따라서 육체의 욕망은 육체의 사랑이다. 육체의 사랑을 억제하고 극기를 수행하는 것은 인간의 삼위일체 본성을 타락시킨다. 그런 사랑은 육체에 필수적이다. 이는 그 본질적 조화를 유지하는 이상에 이르도록 돕는다. 그러나 인간은 육체적 욕망의 충족만이 존재의 목적이 아님을 깨달아야 한다.
이런 육체적 욕망만 쫓는 것은 다른 본성의 욕구를 만족하지 못한다. 그것은 사람을 끊임없는 고통 속에 있게 한다. 스피노자는 말했다. 「슬픔과 불행의 주된 원인은 과도한 사랑인데 이것은 여러 가지 변형이 있으며, 우린 이것을 결코 통제할 수 없다. 통제할 수 없는 무언가를 향한 사랑만이 불의와 불행, 원한 등을 낳는다」
실제로 이것은 우리가 육체적 이상의 한계를 알아야 한다는 의미다. 그들이 제공할 수 있는 것과, 그리고 그들이 육체에 작용하는 정도까지만 그들을 사랑하라. 그들은 인간의 본성을 충족시킬 수 없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