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랠프 월도 에머슨의 에세이 『시인』을 소개하게 되어 기쁩니다. 지혜로운 철학자는 우리가 신의 자녀이며 우리를 신께 다시 인도할 수 있는 스승을 찾는 것의 중요성을 『시인』의 비유를 통해 일깨워줍니다.
시인
“[...] 우리는 불을 냄비에 담고 옮기는 것처럼 우리 몸속에 들어갔다. 그러나 영과 조직 사이에 정확한 조정은 없으며 조직이 영의 발아인 것은 더더욱 아니다. 그래서 지적인 사람들은 다른 형태에 관해서도 물질세계가 사고와 의지에 본질적으로 의존한다고 믿지 않는다. 신지학자는 배나 구름, 도시나 계약의 영적 의미를 말하는 것을 공중누각에 가깝다고 생각하지만, 그들은 역사적 증거의 견고한 기초로 다시 돌아오는 것을 선호한다. 그리고 시인조차 시민으로 순응하는 생활 방식에 만족하며, 자기 경험에서 안전한 거리를 두고 상상으로 시를 쓰는 것에 만족한다. 그러나 세상의 최고 지성들은 모든 감각적 사실의 이중적 의미나 사중적 의미, 백 가지 의미 또는 훨씬 많은 의미를 탐구할 것을 결코 멈추지 않았다. 오르페우스, 엠페도클레스, 헤라클레이토스, 플라톤, 플루타르코스, 단테, 스베덴보리, 조각과 그림, 시의 대가들도 그렇다. 우리는 냄비나 수레도 아니고 불을 나르는 자나 횃불을 드는 자도 아니다. 하지만 불의 자식이고 불로 만들어졌으며, 동일한 신성에서 변형되었고 두셋이 없어졌을 뿐이니 그에 관해 거의 알지 못한다.
이 모든 시간의 강과 그 생물이 흘러나오는 샘은 본질적으로 이상적이고 아름답다는 이 숨겨진 진리는 우리를 시인이나 아름다움을 지닌 사람의 본질과 기능, 그리고 그가 사용하는 수단과 소재와 현시대 예술의 전반적인 측면에 대한 고찰로 이끈다. [...]
모든 사람은 자기가 겪은 일을 대화로 알릴 만큼 예술가가 되어야 한다. 그러나 우리 경험에서 광선이나 천체의 운동은 감각에 도달하기에 충분한 힘을 가졌지만, 민감한 자에게 닿고 말로 재현하게 만들기엔 충분하지 않다. 시인은 이러한 힘이 균형을 이루고, 방해받지 않으며 다른 사람이 꿈꾸는 것을 보고 다루는 사람이고 경험의 전 범위를 가로지르는 사람으로 가장 큰 수신 및 전달 능력을 지닌다는 점에서 인간을 대표하는 사람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