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아우구스티누스는 4세기 말과 5세기 초에 현재의 알제리인 히포에서 존경받는 기독교 주교였습니다. 그는 가장 위대한 기독교 철학자 중 한 분이며 아직도 보존된 백 권의 책과 3백 개의 서신, 5백 개 강론을 집필한 다작의 작가였지요. 그의 가장 중요한 작품으로 『신국론』 『그리스도교 교양』 『고백론』이 있습니다. 존경받은 이 주교는 또한 자비로운 채식인이었고 『고기와 술뿐 아니라 너무 맛있는 다른 진수성찬도 먹지 않는』 이들의 삶의 방식에 주의를 기울였으며 성 바울의 말을 인용했지요. 『고기를 먹거나 술을 마시지 않으며 형제자매를 타락시키는 어떤 일도 하지 않는 것이 좋다』
오늘은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저서 『신국론』을 발췌해서 읽겠습니다. 여기서 성자는 땅에서 악마가 어떻게 인간에게 복된 불멸의 삶을 향하지 못하게 방해하며, 중재자이신 그리스도만이 인간을 변함없이 고양하며 영원한 행복을 얻는 유일한 길인지 자세히 설명합니다.
9권 14장: 인간은 죽어야 할 존재이지만 참된 복락을 누릴 수 있는가?
인간이 죽을 운명이면서 복된 존재가 될 수 있는지는 인간에게 중요한 질문이다. 자신의 상황을 보다 겸허히 보는 이는 죽어야 하는 삶을 사는 동안 복된 존재가 될 수 없다고 하지만, 다른 이는 이와 달리 인간은 죽을 운명이지만 지혜를 얻으면 복된 존재가 될 수 있다며 대담하게 주장한다. 하지만 그렇다면 왜 지혜로운 사람들이 비참하게 죽어야 할 인간과 복된 불멸의 존재의 중재자가 되지 않는가?
그들은 후자와 같은 복된 존재이면서 전자와 같은 죽어야 할 운명을 가졌는데 말이다. 그들이 복된 존재라면 분명히 아무도 부러워하지 않겠지만(부러움보다 더 비참한 것은 없으니까) 비참하고 죽을 이들을 복된 존재가 되도록 도와 사후에 그들이 불멸이 되어 복된 존재와 불멸의 천사들과 함께 교류하도록 온 힘을 다해 돕는다.
15장: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 하나님과 사람의 중재자
그러나 모든 이가 죽을 운명이며, 비참한 것이 훨씬 더 개연성 있고 믿을 만하다면 우린 인간이면서 동시에 하나님이신 중재자를 찾아야만 한다. 그는 복된 죽을 존재라는 중간적 입장으로 인간을 죽음의 비참함에서 빼내어 복된 불멸로 데려갈 것이다. 이 중재에는 두 가지가 요구되는데, 그는 죽어야 할 존재가 되지만 죽을 존재로 계속 있어서는 안 된다. 죽어야 할 존재가 되었지만 이는 말씀의 신성이 약해진 것이 아니라 육신의 연약함만 취한 것이다. 그는 계속해서 육신의 죽을 운명에 있지 않고 죽은 몸에서 살아난다. 이것이 그의 중재의 산물이며 사람들의 구원을 위해 중재자가 되었기에 그가 영원히 육신의 죽음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 그는 우리와 하나님의 중재자 되었기에 일시적인 죽음과 영원한 복락을 모두 가진다.
일시적인 죽음을 통해 그는 죽어야 할 인간을 이해할 수 있고, 인간을 죽어야 할 존재에서 영원한 존재로 바꾸게 된다. 따라서 선한 천사들은 죽어야 할 비참한 인간과 복된 불멸의 존재를 중재할 수 없다. 그들은 복된 존재이며 불멸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악한 천사는 중재할 수 있는데, 천사처럼 불멸이면서 인간처럼 비참하기 때문이다.
불멸이면서 비참한 악한 천사들과 반대로 선한 중재자는 일시적으로 죽음의 운명을 선택했지만 영원히 복된 존재로 계속 머물 수 있다. 따라서 자기 죽음이란 겸손과 복된 존재라는 은혜를 통해 교만하고 해를 끼치는 악마들을 파괴하고 악마들이 자신의 불멸성을 과시하여 비참함의 길로 유혹하는 걸 막고 믿음으로 마음을 정화한 사람들을 악마의 불순한 지배에서 벗어나게 한다. 그렇다면 죽을 운명이자 비참하여 불멸과 복된 존재에서 아주 멀어진 인간이 다시 불멸과 행복을 얻기 위해 어떤 중재자를 선택해야 하는가? 인간에게 매력적으로 보일 수 있는 악마의 불멸은 비참하다. 인간을 불편하게 하는 그리스도의 불멸은 더는 존재하지 않는다. 전자는 영원한 불행이란 두려움이 존재한다.
후자는 영원할 수 없는 죽음을 더는 두려워하지 않으며 영원한 복락을 사랑해야만 한다. 불멸의 비참한 중재자인 악마는 우리가 복된 불멸로 가지 못하게 막는다. 왜냐하면 그에게 그런 길을 방해하는 비참함이 계속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죽을 운명이자 복된 중재자는 직접 끼어들어 피할 수 없는 죽음을 통해 넘어가서 사람들이 불멸이 되게 하고(자신의 부활에서 이것을 이룰 힘을 보여주심) 중재자 자신이 절대 떠나지 않았던 일원들을 비참함에서 복된 존재와 함께 하도록 올려준다. 친구들을 갈라놓는 사악한 중재자가 있는 반면 적들을 화해시키는 선한 중재자가 있다.
갈라선 이들은 많다. 왜냐하면 축복받은 다수의 복된 자는 오직 한 분이신 하나님의 편에 섰기에 축복을 받으나 악한 천사의 편에 서면 결핍할 뿐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악하며 이런 지복으로 가는 걸 돕기보다는 차라리 방해하여 우리가 행복에 이르지 못하게 한다. 지복을 얻으려면 많은 중재자가 아니라 하나의 중재자가 필요하다.
그분은 창조되지 않았으며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말씀이고 그분의 편에 서면 축복을 받는다. 난 그분을 중재자라 말하지 않는데 그분은 말씀이고, 말씀으로 그분은 지고의 축복을 받았으며 지극하신 불멸의 존재로 비참한 죽을 운명과는 완전히 다르다. 하지만 인간이시며 중재자이시다. 그분의 인간성을 통해 복된 존재와 지복을 얻기 위한 길을 우리에게 보여주신다. 이것을 얻기 위한 연속적인 단계로 우리를 이끄는 다른 중재자를 찾을 필요가 없다. 그러나 복된 존재이신 지복의 하나님은 우리 인류의 편이 되어 우리가 그분 신성의 편에 서기 위해 들어갈 준비를 하도록 만든다. 죽을 운명과 비참함에서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주님이 축복받은 불멸의 천사에게 우리를 인도하지 않기에 그들의 본성에 합류하여 불멸의 복된 존재가 되어야 한다.
주님은 우리를 천사들의 축복에 합류시키므로 곧바로 삼위일체로 인도한다. 그러므로 주님은 천사보다 낮은 종의 형체를 취하시어 우리의 중재자가 되시며, 하나님의 형상으로 천사보다 더 높은 곳에 계시니 땅에서는 생명의 길이요 하늘에서는 생명 그 자체이시다.
17장: 최고 선에 참여함으로써 복된 생명에 이르기 위해 인간은 악마와 같은 중재자가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와 같은 중재자만을 필요로 한다. 여기 아래에서 육신의 죽을 운명으로 우리와 하나가 되고, 동시에 주님 성령의 불멸의 의로움으로 우리를 씻어주시고 자유롭게 해주시며 하늘에 머물면서 여기 땅에도 있으시고 참된 신성의 도움을 줄 수 있는 중재자가 필요하다.
불결해지실 수 없는 하나님이신 관계로 인간의 형상을 취하고 인간 사이에 있어도 불결해질까를 염려하실 필요가 없다. 주님의 성육신을 통해 우리에게 보여주신 두 가지 유익한 가르침은 육신으로 말미암아 참된 신성이 불결해지지 않음과 악마에겐 육신이 없더라도 우리보다 더 나은 존재라고 믿을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주님은 성경에 기록된 대로 『하나님과 사람의 중재자』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이며 그 신성은 아버지와 항상 동등하시며, 그분의 인성은 우리와 비슷하게 되셨다.